김영철
1948.08.18.~1998.08.16.
전쟁과 가난
김영철은 1948년 8월 18일(음력 7월 14일)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으로부터 두 달뒤, 그의 고향은 10·19 여순사건의 거센 파고에 휩쌓였다. 설상가상으로 2년 후인 1950년에는 6·25 전쟁이 발발했다. 김영철은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었다.
1953년부터 김영철은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목포모자원에 입소하여 생활했다. 1955년 6월, 이들 가족은 광주에 위치한 인성모자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영철은 그곳에 있던 수많은 전쟁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장했다. 당시 인성모자원에는 훗날 광주 YWCA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게 되는 서경자 원장이 있었다.
김영철은 모자원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에 임했고, 그곳에서 서석초등학교와 광주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광주일고는 당대 호남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혔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광주일고에 진학하기 위해 삼수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2020년 현재 광주일고 출신 국회의원이 42명에 이르며, 특정 고등학교에서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합참의장, 검찰총장 등이 모두 배출되었다는 사실에서 당대 광주일고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영철에게는 대학에 진학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주말마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을 했다. 그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의 동창들은 서울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전남대 혹은 조선대에 진학했으나 영철은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심정은 당시 그가 작성한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학년 1반 복도에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멀리서 기적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아, 이제 나의 학창시절도 끝이구나. 언제 생활난이 풀려 대학을 나올 수 있을지….”
1967년 1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영철은 5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불과 1년 후인 1968년 지방 5급 행정직 시험에 합격했고,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푼 마음을 안고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깊은 회의감을 주었다. 당대 공무원 사회와 농협의 부패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1년 3개월만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때는 1969년으로 불과 1년 전 박정희 암살을 위해 남파된 김신조 일당이 검거된 1·21 사태로 인해, 당시 군 복무기간은 3년 6개월에 달했다. 김영철은 다행히 국방부 본부 영문 타자병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1972년 11월 30일자로 제대했다.
김영철은 군 제대 이후 4년간 서울에서 밑바닥 생활을 했다. 신문 배달과 청과물 장사를 했으며 건설현장을 전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철은 이웃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다. 몇 년간의 고행을 마친 그는 7년간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고 있던 김순자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곧 아이가 생겨났다. 김영철은 아들에게 ‘동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광주 광천동시민아파트 A동 216호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광천동을 북적이게한 마을 운동가
1976년 1월, 김영철은 사실상 어머니와 다르지 않던 서경자 원장의 권유로 제 51차 신용협동조합 지도자교육에 참석했다. 김영철은 그곳에서 의형제의 연을 맺게 되는 박용준을 만나게 된다. 1977년 2월, 영철은 광주 YWCA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용준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용준은 갓난아이 때 영아원에 맡겨진 이래 평생을 홀로 살아온 천애고아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철은 어머니와 함께 모자원에서 지냈던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1977년 11월, 김영철이 박용준에게 본인의 집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용준은 이를 급구 사양했지만, 영철은 리어카를 끌고 와서 YWCA에 있던 용준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김영철과 김순자, 박용준 세 사람은 광천동시민아파트 A동 216호에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한동안 행복했다.
1977년, 김영철은 광천동 마을운동에 투신,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그는 광천동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한 청년회 총무를 자처했고, 동네 청년들을 설득하여 주기적인 마을 청소를 시작했다. 당시 광천동시민아파트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화장실이었다. 공동화장실이 재래식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자, 마을 주민들은 점차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영철은 A동 반장으로 선출되었고, 광천동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이 되었다.
들불야학 생활강학이 되다
1978년 6월, 광주 광천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남대 재학생 몇 사람이 광천동 광주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한 노동야학 ‘들불야학’ 설립 준비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그즈음 김영철은 우연히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전남대 학생운동가 김상윤과 재회했다. 당시 김상윤은 들불야학 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광천동에 와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김상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영철에게 들불야학을 소개시켜 주었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천동 주민운동의 대표자로 여겨졌던 김영철에게 입학식 축사를 부탁했다. 1978년 7월 23일, 김영철은 들불야학 1기 입학식에 참석, 축사를 했다. 이후 김영철과 박용준 두 사람은 각각 생활강학과 특별강학으로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영철은 들불야학에서 윤상원, 박관현, 박효선 등과 친분을 쌓았다. 김영철과 박용준은 주로 광주 충장로에 위치하던 광주 YWCA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윤상원, 박기순 등은 광천동 들불야학에 집중했다. 1980년이 되자 박관현 등은 학교로 돌아가 총학생회 활동을 했다. 윤한봉은 이들 모두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들불야학은 여러 영역에 걸쳐있는 활동가들이 모이는 거점이기도 했다.
오월, 그날이 오다
1980년 5월까지도 김영철은 광천동을 중심으로한 마을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나름의 향후 계획까지 수립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날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의 삶에 들이닥쳤다.
일요일이던 1980년 5월 18일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다음날, 계엄군은 광주 YWCA에 난입했다. 김영철은 항쟁 초기부터 시민들의 대열에 함께했다. 5월 20일에는 중앙교회 인근에서 날아드는 돌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었다. 광주는 이전과 달랐다. 5월 21일,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금남로에 집결했다. 당혹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M-16 자동소총을 난사하고는, 광주를 빠져나가버렸다. 그들은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러나 군부가 바라마지 않았을 치안의 부재, 약탈, 방화와 같은 일은 해방 광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은 서로가 가진 것들을 나누었고, 함께 거리를 청소했다. 들불야학 팀은 유인물 투사회보를 배포했으며, 시민궐기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월 23일, 제 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전남도청 앞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집회는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박효선, 김태종 등이 녹두서점에 모여 기획한 집회였다. 김태종이 집회 사회를 맡았고,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계층 대표자 발언, 모금 등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김영철은 노동자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다. 5월 25일, 김영철은 새롭게 구성된 도청항쟁지도부에서 시민군 기획실장을 맡게 된다.
1980년 5월 26일, 시민들에게 다음날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열린 궐기대회에 모인 시민들은 각자의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김영철은 도청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그와 함께 많은 시민들이 전남도청, YMCA, YWCA, 전일빌딩 등에 남았다. 곧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7일, 김영철은 전남도청 2층 민원실에 있었다. 그 자리에는 윤상원, 이양현, 윤석루, 이재호 등이 함께 있었다. 새벽 3시를 넘어선 시점부터 마지막 방송이 진행되었다. 절절한 호소가 새벽의 공기를 가득 메웠다. 이양현은 사회과학 공부를 할 당시에 읽었던 ‘역사란 무엇인가’를 되새기며 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김영철은 아마 곧 태어날 둘째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김순자는 당시 임신 7개월의 몸이었다. 이윽고 30분 동안 이어진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광주는 다시금 적막에 휩쌓였다. 방송이 끝났음을 확인한 이양현 시민군 기획위원이 도청 전기를 내렸다.
잠시 후 3공수여단 선봉대가 도청 후문을 박차고 내부로 진입했다. 이들은 곧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달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민원실에 M-16 총탄이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10일 간 이어진 광주시민들의 위대한 항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상실과 고통, 트라우마와 후유증
체포된 김영철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의형제로서 함께 살아왔던 박용준이 마지막까지 YWCA를 지키던 중 반란 군인들의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김영철은 상무대 영창 5소대로 끌려갔다. 영창장을 맡고 있던 박춘배 중사는 “너희들은 상부에서 죽여버려도 괜찮다”고 했다며 조사에 협력하라고 겁박했다. 곧 김영철이 시민군 기획실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날 밤, 김영철은 화장실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벽에 머리를 여러차레 들이받았다. 헌병들이 달려와 김영철을 마구 구타하더니, 곡괭이 자루까지 들고와 쉴새 없이 때리고는 포승줄로 결박하여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시켰다.
1980년 10월 25일, 김영철은 계엄보통군법회의 선고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계엄고등군법회의 선고에서는 형량이 7년으로 줄었다. 그는 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의 말을 듣고 외쳤다.
“위대한 광주시민 만세…!”
1980년 9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군사법정, 7번 피고인 김영철. 1981년 3월 31일, 김영철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확정받았고, 그해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이후 김영철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는 횡설수설을 하거나 몸부림을 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검사결과 우측 뇌에 뇌수종이 있어 수술을 받았고, 이후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나주 정신병원, 영광 신하기독병원, 조선대 병원 등을 전전하며 장기간 투병생활을 했다. 정신이상 증세가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그는 사방에 머리를 찧었고, 자주 울부짖었다.
1998년 7월 22일, 김영철은 영광 신하기독병원 정신과에 입원한 상태였다. 이날, 그는 그곳에서 간식으로 나온 빵을 먹던 중 기도가 막혀 질식으로 쓰러졌다. 8월 16일, 김영철은 조선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약력
- 1948. 전남 순천시 금곡동에서 아버지 김경묵씨와 어머니 백은혜씨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남.
- 1967.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 1968. 국가지방행정직 5급 공무원시험 합격, 승주군 별량면 사무소 1년 6개월 근무.
- 1972. 군 제대 후 신문배달, 청과물 장사, 목장 잡부, 우산팔이 등을 함.
- 1976. 김순자 여사와 결혼, 빈민들이 모여 사는 전남 광주시의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이사.
- 1976. YWCA 전남 협동개발단 간사로 취업, 광천동 시민아파트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운동을 전개.
- 1978. 7. 광주 YWCA 신협 참사로 전보, 시민아파트 바로 곁에 있는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 「들불야학」이 시작되자 적극 참여, 토의 진행법, 세계사, 오 락 프로그램 등을 가르치는 “생활” 강학으로 활동.
- 1980. 5.18. 5.18 민중항쟁에 참여,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 활동.
- 1980. 5.27.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 체포, 고문, 투옥 당함.
- 1981. 12.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됨.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 증세 보임.
- 1984.~1998. 나주 정신병원, 조대병원, 영광 기독신화병원 등에 입원하는 등 장기간의 투병생활을 함.
- 1998. 7.21. 호흡곤란으로 위독 상태에 빠짐.
- 1998. 8.16. 영면.
광주빈민운동의 선구자요 영원한 들불인 고 김영철 투사는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서 광주민중항쟁을 최후까지 모범적으로 이끈 지도자입니다. 항쟁 이후에도 불굴의 투혼으로 항거하다 병마의 고통 속에 마침내 이곳에 영면하시다.
묘역번호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