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일
1958.10.08.~1988.05.09.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선구자
신영일은 1958년 10월 8일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도 곧 잘 해서 당대 지역 명문으로 유명했던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훗날 들불야학을 함께하는 전용호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3년 간 내리 같은 반이 되었고, 함께 재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낸다. 전용호의 회고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조나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커피숍을 빌려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통기타와 담배, 막걸리와 함께한 학창시절이었다.
1977년 3월, 신영일은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현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는 신입생 시절 직접 노래를 만들어 통기타를 들고 대학가요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일에 관심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영일은 전남대에 입학한 직후 광주일고 이념서클 ‘피닉스’ 출신들이 전남대학교에 만든 사회과학서클 ‘독서잔디’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여러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으며 사회에 대한 고민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의 서명이 포함된 성명서 한 장이 광주를 뒤흔들었다. 그해, 전남대 교수들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내세운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 박정희 정권을 정면 비판했다. 다음날 교수들은 전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전남대 재학생들은 분노하였고, 곧 중앙도서관 앞 뜰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78년 6월 29일, 신영일은 같은 국사교육과 재학생이었던 박기순, 문승훈과 함께 캠퍼스를 넘어 거리로 진출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전남대 정문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계림동 녹두서점까지 행진하며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이 시위에서 광주 운동사상 처음으로 ‘헤쳐 모여’ 전술이 등장한다. 이들은 시위가 경찰의 봉쇄에 의해 막힐 경우에 대비, 차기 집결 장소를 사전에 공지했다. 충장로 진출에 실패하면 1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4시에 조선대 정문에서 집결하자는게 이들의 전술이었다. 시위는 성공적으로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되었다. 경찰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서슬퍼런 유신시대에 가두행진이 광주 전역을 뒤흔든 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6.29 사건 직후, 문승훈 등 18명은 구속되었고, 신영일, 박기순 등 10명은 전남대학교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들불야학에 합류하다
6.29 사건으로 제적된 전남대 학생운동가들은 굴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박기순이 앞장서서 광주공단에 노동야학 ‘들불야학’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곧 신영일에게 1기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해줄 것을 요청했다. 신영일은 들불야학 1기 강학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에는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일에도 함께했다. 광주 지역 경찰들도 신영일을 요주의 인물로 여기고 감시했다.
1979년 10월 17일, 들불야학 2기 강학인 고희숙이 친구 박유순과 함께 전남대학교 상담지도관실에 불을 질렀다. 상담지도관실은 군부독재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각 학교에 설치한 감시기구였다. 10월 17일은 유신헌법 선포 기념일이었다. 두 사람은 유신체제의 최후적 발악에 광주도 침묵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찰들은 빠르게 수사에 착수했다. 평소 마크하고 있던 활동가들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신영일도 배후 인물로 몰려 체포되었고, 전남도경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해당 사건은 실제로 고희숙과 박유순 두 사람이 일으킨 사건이었으나, 가부장제에 물들어있던 경찰들은 배후 조종자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신영일이 경찰서에서 1주일이 넘는 시간을 보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됨에 따라, 18년에 걸친 박정희 유신독재는 허탈하게 막을 내렸다. 경찰들은 태도를 급히 수정했고, 구속된 이들 중 몇사람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나머지는 재판에도 회부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9·29 사건을 주동하다
박정희 사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조합과 총학생회가 각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군부는 다시금 반란을 일으켰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 군대를 보냈다. 활동가들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했다. 언젠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 위해서는 우선 운동 역량을 남겨야 했던 것이다. 신영일은 마지막까지 광주에 남지 못했다. 그는 다만 본인이 목격한 5.18 초기 광주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남긴 기록은 서울 학원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지명수배중이던 소준섭에게 전달되었고, 팸플릿 ‘광주백서’에 실렸다. 이는 훗날 신영일 절친이었던 전용호가 이재의와 함께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신영일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윤상원과 박용준은 그날 새벽 계엄군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김영철은 총탄 파편을 맞은 채로 상무대로 끌려갔다. 박효선과 박관현은 쫓기는 몸이 되었다. 신영일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한동안 대한민국은 침묵에 휩쌓였다. 시민들을 학살한 자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언론인들도 지식인들도 학생들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1년이 지나고도 광주의 오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던 서슬퍼런 시절이었다.
1981년 여름, 전남대 재학생 신영일, 임낙평, 이광호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학내에서 시위를 주도할 작정이었다. 사실 이들은 5.18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이하는 1981년 5월 18일에 시위를 진행할 작정이었으나, 계엄을 방불케하는 삼엄한 경비에 시위를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5.18 1주년을 기리는 시위를 9월을 한참 넘긴 시점인 9월 29일에야 진행하게 되었다.
1981년 9월 29일, 신영일, 임낙평, 이광호 세 사람은 ‘반제·반파쇼 민족해방 학우 투쟁 선언문’을 가슴에 숨기고 전남대 1학생회관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다른 곳에서는 시위 진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모여있고 감시도 비교적 느슨한 점심시간의 구내식당을 택한 것이다. 식사를 하는 척하던 신영일이 의자 위에 올라가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이들은 준비해온 유인물을 배포했고 학생들에게 시위를 하자고 했다. 이들은 전남대 정문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잠시 후 페퍼포그와 함께 경찰들이 달려왔고, 물론 세 사람은 전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남대학교를 짙게 누르고 있던 침묵을 일거에 깨뜨린 사건으로 분위기 전환의 시작점이 된다.
1982년, 구속된 신영일과 임낙평은 감옥에서 박관현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재회한다. 그는 이미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영일 역시 박관현과 재회한 직후부터 단식투쟁에 합류했고, 40여 일간 지속했다. 박관현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영일은 충격으로 신경쇠약 증세에 빠졌고, 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멈추지 않고 사회운동을 지속하다
신영일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1년간 투병생활을 했고, 그 직후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1984년 광주 YWCA에서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구성되자, 홍보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지역을 기반으로한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을 해야한다고 믿었다. 1986년 3월, 그는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추진 관련 현판식 당시 시위를 주도하여 다시금 수배되었다. 두 달뒤, 1986년 5.3 인천항쟁이 발발하자 직선제 개현을 요구하며 헌신적으로 항쟁에 가담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수배가 해제되자 전남민주청년협의회의 후신인 전남 민주주의 청년연합에서 부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과로로 운명하다
이렇듯 신영일은 5.18 직후에도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활약했다. 먼저 간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희생과 헌신에는 무거운 댓가가 따랐다. 그는 감옥에서 40일 넘는 기간 동안 단식을 했고, 투병생활을 마친 후 일선에서 쉴새 없이 일해왔다. 건강 상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오던 신영일은 1988년 5월 9일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약력
- 1958. 10. 8. 전남 나주시 남평면에서 신만원 씨와 김순례 여사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 1977. 3.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입학.
- 1978. 6. 29 전남대 교수들의 민주교육지표선언에 따른 학생시위에 참여. 무기정학처분을 당함- 들불야학에 국사강학으로 참여.
- 1978. 11. 박관현, 김정희 등과 함께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활동에 참여.
- 1979. 10. 전남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관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 1981. 9. 29. 임낙평, 이광호 등과 함께 전남대에서 ‘반제․반파쇼 민족해방 학우 투쟁선언문’ 발표, 교내 시위 주도. 투옥.
- 1982. 10. 광주교도소 수감 중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 주장하며 박관현열사와 함께 40일간 단식투쟁 – 박관현열사 숨짐. 충격으로 신경쇠약 증세 나타나 병보석 출소.
- 1984. 11. 18. 정상용, 정용화, 송재형 등과 함께 전남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전남민주청년협의회」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 홍보부장으로 활동.
※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그 뒤「전남 민주주의 청년연합」(전청련)으로 이름이 바뀜.
- 1986. 3. 30. 광주의 신민당 직선제 개헌추진 현판식 때 시위주도, 수배됨.
- 1986. 5. 3. 5․3 인천항쟁에 참여.
- 1987. 6. 수배해제, 「전남 민주주의 청년연합」(“전청련”)활동에 헌신.
- 1988. 5. 9. 과로로 운명.
청년이여 청년의 모범이여. 살아서 민중의 방패 죽어서 민중의 창이 되다. 홀로는 불꽃으로 숨쉬며 어우러져서는 들불로 타오르다. 어둠의 산하를 헤쳐 새벽의 보람찬 세상으로 함께 가고져... 전청년회원 일동
묘역번호 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