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순
1958.11.07~1978.12.26.
학생 운동에 뛰어들다
“한국에서 대학은 필요악이다.
가난한 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로
덕을 입고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은
불합리하게 혜택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난한 자와 함께
진정한 역사 창조의 대열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박기순의 일기 중
박기순은 1957년 1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성여중을 졸업한 후 광주에 위치한 전남여고에 진학했다. 전남여고는 3.1 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였다. 1929년 11월 3일, 일본인 학생의 성희롱에 분노한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明治)절 행사장을 박차고 거리에 진출했다. 이후 조선 팔도 198개 학교 5만 4천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해방 직후, 광주여고보는 전남여고가 되었다. 박기순은 전남여고 재학 시절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여학도 기념비’를 보고 교지에 글을 남겼다.
“우리 어찌 잊으리 조국의 자유를 외치던 언니들의 외침을! 학생운동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전남여고와 더불어 그대(기념비)는 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이 대목에서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이 남긴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주는 영향력이란 수치화되지 않았을 뿐, 엄청난 것이다.” 윤한봉이 광주일고(광주고보 후신)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광주일고 학생들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역사의 흐름에 작용했음을 회고하며 남긴 말이다.
1976년,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현 역사교육과)에 진학했고, 그 직후 사회과학서클 ‘루사’에 합류했다. 1971년 민족사회연구소 설립 이래 전남대에는 여러 사회과학서클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야유회를 다니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박기순은 또한 동료 활동가들에게 전설적인 선배였던 박형선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박형선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박정희 정권이 4월 8일까지 자수할 것을 권고하자 그 다음날인 4월 9일에 전남대 반(反)유신 시위를 감행했다. 박형선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러나 박기순은 스스로는 단 한번도 박형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날 이를 의아하게 여긴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대의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실로 주체성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전남대 제적과 위장취업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선언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해당 문건은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선언문에 서명한 교수 전원을 체포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6월 29일, 전남대생들이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남대 활동가 노준현이 연설과 함께 집회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노준현은 교직원들에게 끌려갔으며, 경찰에 인계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2, 3층을 점거하고 밤늦게까지 농성을 진행했다. 이날 100 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다음날, 전남대 측은 7월 5일까지의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날 시위는 박기순, 문승훈, 박석삼이 주동했다. 이들은 전남대 정문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계림동 녹두서점까지 행진했다. 이 시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헤쳐 모여’ 전술이 등장했다. 이들은 시위가 경찰에 의해 봉쇄될 경우에 대비, 차기 집결장소를 사전에 공지했다. 충장로 진출에 실패하면, 1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4시에 조선대 정문에 집결하자는 게 이날 이들이 세운 전략이었다. 시위는 성공적으로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되었다. 경찰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과 관련하여 1주일간 지속된 시위 결과 전남대, 조선대 재학생을 비롯한 시위 참여자 500 여명이 연행되었으며, 이중 14명이 구속되었다. 전남대 3학년생이던 박기순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얼마 후, 박기순은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취업처는 광주 광천동에 위치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하청업체 동신강건사였다. 1년만 더 학교에 다녔다면 교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다.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들불야학을 만들다
이보다 앞선 1977년 박기순은 광주 산수동에서 진행된 ‘꼬두매 야학’에 참여했다. 해당 야학은 운동성을 갖춘 곳은 아니었고, 검정고시 공부를 중점으로 운영되었다. 꼬두매 야학은 불과 10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박기순은 그곳에서 야학 운영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 박기순은 서울로 올라가 여러 노동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노동운동 동향을 살폈다. 특히 서울의 노동야학 ‘겨레터 야학’을 둘러보고 깊은 울림을 받았다고 한다. 1978년, 겨레터 야학 활동가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이 광주에 왔다. 셋은 모두 광주 출신이었다. 전복길과 김영철은 서울대 재학생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영영장을 받은 상태로 광주에 왔다. 겨레터 야학 활동가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박기순은 이들을 찾아가 함께 야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네 사람은 뜻을 모았고,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박기순의 권유를 받고 신영일과 임낙평이 준비팀에 합류했다. 최기혁, 김영철은 고등학교 동창 나상진을 끌어들였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박기순,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 신영일, 임낙평, 나상진. 여기에 입학식 이후 이경옥이 합류하여 들불야학 1기 강학은 총 8명이다.
이들은 함께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강독했다. 해당 책은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주체로서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교육은 자유의 실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들불야학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진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들불야학에는 ‘강학’과 ‘학강’이 있었다. 강학, 배우면서 가르친다. 학강, 가르치면서 배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대체한 이와 같은 새로운 구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실천이었다.
들불야학의 이름 ‘들불’은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그는 유현종의 소설 ‘들불’에서 이름을 땄으며, ‘들불’이라는 단어가 ‘미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도 등장한다며 관련 내용을 제시했다. 노동절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였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박기순의 안은 가볍게 통과되었다. 다음으로 야학을 운영할 장소가 논의되었다. 노동야학에 걸맞게 광주 유일 공단지역인 광천동에 터를 잡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공간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기순은 주변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정을 들은 카톨릭 농민회 장두석이 친하게 지내던 조비오 신부에게 광천동성당 관계자를 연결받았다. 박기순이 직접 관계자를 찾아가 부탁했고,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광천동성당 교리학습실을 빌릴 수 있었다. 이어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 홍보 결과 35명이 들불야학에 1기 학강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78년 7월 23일, 들불야학 입학식이 열렸다. 광천동 마을 운동가 김영철(동명이인)과 광천동성당 신부가 축사를 했다. 곧 1기 강학 전복길, 김영철이 군대에 입대했다. 예정된 일이었다. 새로운 강학이 필요했다. 함께할 사람을 수소문한 결과 전용호, 배환중 등이 대기강학으로 합류했다. 박기순은 대학 졸업 후 서울 주택은행에 취업했던 윤상원이 광주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에 성공했지만, 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에 돌아왔고, 광천공단에 취업했다. 박기순은 윤상원을 찾아가서 들불야학 참여를 권유했다. 윤상원은 처음에는 박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박기순의 삼고초려에 결국 들불야학에 대기강학으로 합류했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2기 강학)는 이날 열린 대기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1978년 12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들불야학 팀이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로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박효선은 3기 특별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하여 ‘문화’를 다루게 된다. 윤상원이 들불야학에 합류하고 두 달 남짓, 들불야학은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뒷풀이를 했다. 윤상원은 광천시민아파트에 방을 얻어 백재인 학강과 함께 거주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박기순과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 화정동에 뗄감을 하러갔다. 이들은 광주소년원 뒷편 야산에 올라 장작을 모았다. 그날 밤, 박기순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당시 박기순은 오빠인 박형선과 윤경자 부부, 막내 박동준과 함께 주월동 국민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사돈에 해당하는 윤한봉이 자주 집에 찾아왔다. 그날도 윤한봉이 왔다. 박기순이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윤경자는 윤한봉에게 박기순의 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나 곧 박기순이 왔다. 윤한봉은 큰 방에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윤경자가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박기순이 일어나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했다.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박기순이 문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즉시 전남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연탄가스 누출사고였다. 박기순, 스물 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광주 전남 최초로 위장취업자가 되었던 활동가였다. 그리고 너무나 애석한 죽음이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전남대병원으로 모여들었다. 황망한 소식에 다들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보낸다고, 통곡하는 들불야학 학강들도 있었다. 위대한 활동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지역 사회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장의위원회가 박기순의 장례를 준비했다. 영결식 이후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1978년 12월 27일, 노동운동가 박기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 광주 전남 지역 활동가들과 들불야학 관계자들이 집결했다. 황석영 작가와 문병란 시인이 조사를 낭독했다. 지난 2월, 박형선과 윤경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한 해를 시작했던 황석영은 박기순의 죽음과 함께 1978년을 마무리하는 현실이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었던 홍승기 교수도 조사를 낭독했다.
“서석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하였습니다. 성탄의 밤은 그렇게도 조용하였습니다. 그 계절의 벼랑에서 저는 너무나도 슬픈,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살아왔습니다. 깊은 골짜기의 쓸쓸함 홀로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당신 앞에서 누가 감히 의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영결식에 참여한 가수 김민기가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한 바 있던 김민기는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들렸다가 황망한 소식을 접하고 영결식에 참석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알고 있는 노래 <상록수>가 박기순이라는 어느 노동운동가의 장례식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운구차는 망월동을 향해 느린 걸음을 시작했다. 들불야학이 터를 잡았던 광천동성당에 들리자 박기순에게 교리학습실을 내주었던 오수성 미카엘 신부가 영결미사를 집전했다. 이후 운구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을 들린 후 망월동으로 갔다. 박기순은 그곳에 영원히 잠들었다. 박기순의 운구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그 길, 도로는 태극기로 가득했다. 다음날인 1978년 12월 28일, 박정희는 제 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재자는 자신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영혼결혼식, 임을 위한 행진곡
박기순의 죽음으로부터 1년 6개월 후, 5.18이 우리에게 왔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투사회보를 만드는 등 항쟁의 일선에서 헌신적으로 싸웠다.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과 박용준은 총을 맞고 죽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김영철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의 아내였던 윤경자가 박기순,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양가에 제안했기 때문이다. 두 집안 모두 영혼결혼식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양가 관계자가 함께한 가운데서 영혼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2달 뒤인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기념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가 제작되었다.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얼마 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 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약력
- 1958.11. 전남 보성군 노동면 용호리 죽현부락에서 아버지 박도주씨와 어머니 선덕애 여사의 3 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남.
- 1976. 전남여자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입학.
- 1977.7. 공용의, 조명옥, 한동철 등과 함께 산수동 경로당에서 ‘꼬두메’ 야학 시작.
- 1978.6.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 관련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음.
- 1978. 5월경부터 광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시위 관련으로 강제 휴학당하고 광주에 내려와 있던 최기혁, 전복길, 김영철 등과 함께 노동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노동야학 설립을 준비함.
- 1978.7.23. 광주시의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수학” 강학을 맡음.
- 1978.10. 하루 일당 800원으로 광천공단 내 ‘동신강건사’에 조립 견습공으로 입사(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 취업).
- 1978.12.25. 야학당 난로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와서 수업 참석하고 밤늦게 귀가.
- 1978.12.26. 새벽에 연탄 가스 중독으로 영면.
※ 1982.2.20.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을 함.
※ 2005.8.26. 전남대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음.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518항쟁 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중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 재학 중 노동자 교육 운동 중 과로로 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