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1950.08.19.~1980.5. 27.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1980년 5월26일 마지막 남긴 말
세상에 눈을 뜨다
윤상원은 1950년 8월 19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윤상원은 본래 윤개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고등학교 시절에 개명을 택했다. 그는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삼수 끝에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직후에는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하게 생활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그에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군 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다. 길었던 군 생활이 막바지에 이른 1974년 10월 윤상원은 아버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5년, 윤상원은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했다. 얼마 후 그는 친구 황철홍에게 김상윤이라는 이름의 선배를 소개받았다. 김상윤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로 당대 활동가들에게 ‘이론적 기둥’으로 통했던 인물이었다. 1974년, 김상윤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며 학생들의 반(反)유신시위 준비를 정권 인수 시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본인들의 수사 결과를 믿지 않았는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상윤은 1975년 2월 15일자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석방 직후부터 활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노준현, 김영종, 김금해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그가 만든 6개월 과정의 학습 소모임을 거쳐갔다. 윤상원 역시 김상윤으로부터 학습 소모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들이 함께 공부한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 노동문제의 구조’ 등이었다. 1970년대 경제발전의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삶을 인지하며, 윤상원은 사회 변화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들불야학에 합류하다
1978년 2월, 윤상원은 대학 졸업 후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취업했다. 2001년, 주택은행은 국민은행과의 대등 통합을 통해 KB국민은행이 되었다. 주택은행은 그만큼 건실한 직장이었다. 그는 한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차마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해 7월, 알고 지내던 후배 박몽구와 조봉훈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쫓기는 몸이었다. 이보다 조금 앞선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선언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해당 선언문은 박정희 군사 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선언에 참여한 전남대 교수 전원을 체포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격렬한 시위를 진행했다. 박몽구와 조봉훈은 해당 시위에 참여하여 쫓기는 몸이 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윤상원의 집에 머물렀다. 상원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갈 것을 결심했다.
그해 8월, 윤상원은 미련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광주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김상윤이 운영하고 있던 ‘녹두서점’이었다. 1977년 7월, 1년 6개월간의 학습 소모임 운영을 마친 김상윤이 광주 계림동에 작은 책방을 열었다. 문병란 시인이 ‘녹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초상화가 벽에 걸렸다. 그곳은 곧 활동가들에게 이론을 보급하는 거점이 되었다. 여러 ‘금서’들이 녹두서점을 통해 광주 지역 활동가들에게 유통되었다.
얼마 후, 윤상원은 광주 광천동 광주공단에 학력을 숨기고 위장취업했다. 취업처는 한남플라스틱이었다. 그곳에서 상원은 은행원 시절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노동에 직면했다. 노동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났다. 그즈음 광주 광천동에는 노동야학 ‘들불야학’이 위치했다. (노동야학은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는 곳이다) 1기 입학식이 1978년 7월 23일에 진행되었으니, 그가 광주에 오기 직전에 설립된 야학이었다.
1978년 10월, 들불야학을 설립한 박기순은 2기 ‘강학(교사)’ 모집을 두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주석1) 들불야학 1기는 8명의 강학(교사)과 35명의 학강(학생)으로 구성되었는데, 강학 2명이 군대에 입대하게 됨에 따라 신입 강학 모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박기순은 며칠 전에 녹두서점에서 만났던 윤상원을 기억해냈다. 기순은 상원에게 들불야학 2기 강학으로 활동해줄 것을 요청했다. 상원은 처음에는 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의 삼고초려에 결국 들불야학에 대기강학으로 합류하게 된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2기 강학)는 이날 열린 대기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2기 강학(일반 사회)이 되었다.
197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들불야학 팀이 광천동성당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공단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윤상원은 들불야학에 합류한 직후부터 백재인 학강과 함께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거주했다. 이날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며 뒷풀이를 했다.
이틀 후인 12월 26일, 들불야학에 황망한 소식이 전해졌다. 들불야학 강학 박기순이 불의의 연탄가스 누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들불야학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장례 기간 내내 학강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오월, 그날이 오다
1979년, 윤상원은 6개월간 ‘일반 사회’ 강학으로 활약했다. 그해 말에는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준비팀’을 꾸려 직접 노동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윤상원은 이때 준비팀에 합류하여 함께 활동했던 전남대 법대생 박관현에게 들불야학 강학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관현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집권해온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18년만에 찾아온 자유를 만끽하며 노동조합, 학생회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30일, 윤상원은 인천에서 진행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식에 광주 전남 중앙위원으로서 참석했다. 이들은 전국 단위 노동단체를 설립하고자 했다. 훗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는 이태복이 활동을 제안했다. 한편, 서울 주요 대학과 마찬가지로 전남대학교에도 총학생회가 재건된다.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박관현이 출마를 결심했다. 관현은 항상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해주고,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양복을 맞추는 것을 도왔다. 민주화의 봄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 달리, 소수 군부는 끝내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군인들이 각지에서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김상윤, 정동년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전남대, 조선대 활동가들도 학교에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는 특수부대에 해당하는 7공수여단 33·35대대가 배치되었다.
다음날 아침, 이들은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충돌한다. 수많은 학생들이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시내에 해당하는 금남로까지 행진했다. 금남로로 달려온 군인들은 거리를 삽시간에 피의 바다로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55명이 중상을 입었고,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다. 군인들의 폭력을 마주한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학생 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변모했고, 5월 21일에는 시위 참여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 당황한 군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바로 시위대를 향한 ‘집단 발포’였다. 수백명이 총에 맞았다. 군인들은 학살 직후 광주를 빠져나갔고, 도시 외곽을 철저히 봉쇄했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윤상원은 이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군인들이 빠져나간 광주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상원은 들불야학 활동가들과 함께 유인물 ‘투사회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프린터가 없었기 때문에 ‘등사기’를 이용했다. 윤상원과 전용호가 글을 쓰면 박용준이 같은 내용의 글을 예쁜 글씨로 여러 장 적었다. 처음에는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했고, 5월 25일 부터는 YWCA에 위치하던 더 좋은 인쇄기구를 사용했다.
1980년 5월 23일, 제 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군인들이 광주를 빠져나간 이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한 차례씩 집회가 열렸다. 26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차례 집회가 있었다. 전날인 22일에 진행된 집회는 현재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진행된 약식 집회였으나, 23일 집회는 나름의 격식을 갖춘 채로 진행되었다.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계층 대표자 발언 등이 있었다. 이날 집회는 윤상원이 이양현, 정상용, 박효선, 김태종 등과 함께 녹두서점에서 기획한 집회였다. 윤상원은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장을 맡은 김창길을 만나 집회 진행 관련 실무를 논의했다. 김창길은 ‘무기 반납’을 완강하게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당시 수습대책위는 무기 반납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었다. 불과 이틀 전에 계엄군의 총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나, 일부 수습위원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군인들에게 다시 치안을 맡기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지배질서에 충실했고, 그만큼 많은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윤상원을 비롯한 청년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 것은 살해된 시민들의 피를 파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무기 반납에 완강하게 반발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수파와 투항파의 ‘강온갈등’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5일, 광주 지역 민주인사들이 YWCA에 집결했다. 윤상원과 정상용은 청년대표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무기 회수를 중단하고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인사들은 고심 끝에 지역 명망가 위주로 구성되었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할 것을 결정했다. 곧 수습위원 25명 명의로 정부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남선과 김종배를 차례로 만났다. 윤상원은 두 사람에게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를 꾸리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무기 반납’을 주장한 김창길 위원장과 크게 갈등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윤상원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 밤, 윤상원은 박남선, 김종배, 정상용, 윤강옥, 박효선, 김영철, 정해직, 이양현 등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을 규합하여 도청으로 갔다. 이들은 전남도청 2층 식산국장실에 진을 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길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달려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도청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조직되어 있는 활동가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결국 김창길은 사의를 표명하고 도청을 빠져나갔다.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 활동가들은 새로운 도청항쟁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개편했다.
윤상원은 도청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았다. 1980년 5월 25일, 외로운 밤이었다.
최후의 항전
1980년 5월 26일 오후 5시, 윤상원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러 외신기자들이 회견에 참여했다.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지금까지의 피해 상황을 전달했다. 당시 회견장에 있었던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그의 눈빛이 그저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윤상원은 “우리는 오늘 패배한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밤이 오고 있었다. 광주는 이미 계엄군에 의한 최후 통첩을 전달 받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다음날 새벽 광주에 진입하겠다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청소년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도청에 남은 시민들은 오늘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끝내 도청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나갈 것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도청에 남을 사람들이 정리된 직후부터 정상용이 이들을 곳곳에 나누어 배치했다. YWCA, YMCA, 전일빌딩에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남았다. 최후의 항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상원은 도청 2층 민원실에 이양현, 김영철, 윤석루, 이재호 등과 함께 남았다. 김영철은 들불야학 강학으로 윤상원과 마찬가지로 광천동시민아파트에 거주했다. 이양현은 윤상원과 함께 김상윤이 운영한 학습 소모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마침내 군인들이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수부대 3·7·11공수여단과 20사단, 31사단 소속 군인 2만명이 동원되었다. 도청에 진입한건 3공수여단 선봉대였다. 이들은 뒷문을 통해 도청에 진입했다. 잠시 후, 3공수여단 군인들이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착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M-16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결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곧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3시간, 도청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시민 16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의 장렬한 항전은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날로부터 ‘그 도시의 열흘’을 알게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윤상원의 말처럼, 그들은 결국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최한 ‘영혼’ 결혼식이었다. 신랑은 19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윤상원이었고, 신부는 들불야학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박기순이었다.
이로부터 2달 뒤인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념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가 제작되었다.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얼마 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 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약력
- 1950. 8. 19.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부락에서 윤석동 씨와 김인숙 여사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 1971. 3. 전남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
- 1978. 2.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 근무
- 1978. 7. 6.27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사직서 제출 후 광주에 내려옴.
- 1978. 10. 25. 광천공단 내 한남플라스틱에 위장 취업.
- 1979. 1. 박기순열사의 권유로 들불야학의 1기 강학으로 참여.(“일반사회”)
- 1980. 4. 30. 경기도 부평에서 열린 「전국 민주노동자연맹」결성집회에 발기인으로 참석. 광주․전남지역 중앙위원에 선임.
- 1980. 5. 18. 정오부터 시위에 참가.
- 1980. 5. 19. 광천동성당의 들불야학교실(성당교리실)에서 들불 강학들과 함께 은밀하게 전단작업 시작.
- 1980. 5. 20. 강학동료들과 함께 “투사회보”제작, 배포 시작함.〈항쟁기간 총13회 발행, 5월 26일 (제9호)부터는 “민주시민회보”로 제호를 바꾸었음〉
- 1980. 5. 24. 투사회보 제작팀, 광천동성당에서 도청 앞 YWCA로 옮겨 제작. 배포활동 계속.
- 1980.5.23~24 수습대책위 중심의 무기반납 주장에 반대하여 동지 규합, 항쟁지도부 재편 준비
- 1980. 5. 25. 「시민․학생 투쟁위원회」결성을 주도. 밤10시에 김영철 박효선 김종배 정상용 박남선, 이양현, 윤강옥, 정해직, 김준봉 등과 함께 결성성공. 타협세력을 몰아내고 도청장악. 스스로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직을 맡음.
- 1980. 5. 27. 새벽4시경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 쿠데타군의 총탄에 쓰러짐.
※ 1982. 2. 20. 박기순 열사와 영혼결혼식 거행.
※ 1997. 망월동 신묘역에 박기순 열사와 합장됨.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518항쟁 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중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 재학 중 노동자 교육 운동 중 과로로 숨지다.
묘역번호 2-11